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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민주화의 숨은 공로자 안치웅을 보내며...

 

 

실종된 민주화 열사 안치웅은 대한민국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숨은 공로자이다.

그는 어느 유명한 사람처럼 세인들의 열렬한 환호도 지지도, 그리고 아무런 보상도 없이 소리없이 사라졌다.

어쩌면 그는 민주화된 대한민국의 오늘을 이뤄 낸 진정한 숨은 공로자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학생과 민중의 상징이라 할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민주화의 제단에 몸과 마음을 바쳐 끝까지 투쟁하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보상도 없이 한낱 이름도 없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다 출소한 뒤 실종된 안치웅 열사에 대한 장례식이 실종 23년만인 지난 29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치러졌다.

이날 오전 9시30분 입관식을 시작으로 유가족과 용산참사 유족 및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전 10시 영결식이 엄수됐다.

김미선 전통무용가의 혼 달래기 춤사위와 배은심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과 박원순 변호사의 조사 낭독에 이어 유족과 친지들의 배례 분향이 이어졌다.

입관식에서 어머니 백옥심(71) 여사는 관에 넣을 옥색 한복을 부여잡고 “우리 치웅이가 있었으면 이렇게 고운 옷을 입혔을 텐데...이렇게 보내야 하다니...”라며 한참을 오열해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배은심 유가협 회장은 “자식이 집으로 찾아올까 매일 밤 형광등을 켜놓고 지낸 세월이 자그마치 23년”이라며 “이것이 이 나라 독재정권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현실”이라고 고인과 유족을 위로했다.

안 열사의 묘지는 경기도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마련됐으며, 서울대 교정을 터난 장례 행렬은 오후 1시경 유족과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관식을 거행했다.

 

 

안 열사는 1982년 서울대 경제학부에 입학한 뒤 이듬해 국제경제학과(무역학과)에 배속돼 1988년 실종되기까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안 열사는 민주화추진위원회 핵심 활동가로서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지원하다가 그 해 6월 구속돼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86년 7월4일 출소했다.

그러나 안 열사는 공안기관의 지속적인 감시와 추적 속에서 1988년 5월26일 오전 “아는 목사를 만나러 간다”며 집을 나선 후 행방불명됐다.

안 열사가 출소한 1986년 당시, 전두환 정권은 학생-노동운동 지도부, 특히 민추위 지도부 궤멸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때다.

안 열사는 출소 이후 복학하여 88년 2월 졸업 후 실종될 때까지 기관원들의 요사찰 대상이 되어 끊임없는 감시와 미행을 당해 왔음이 여러 정황에서 확인된다.

구속당시 그의 변호사였던 박원순 변호사는 2010년 2월 제출한 의견서에서 “의문사위원회와 민주화보상위원회의 조사 자료를 보면, 안치웅은 출소후 지속적으로 감시 사찰을 받은 것으로 판단됨 .... 당시 안치웅이 감시상황에 놓였다고 추단케 하는 정황적 배경들이 확인됨...공안당국의 감시사찰 상황 말고는, 달리 안치웅의 실종을 설명할 합리적 이유가 없음” 이라고 밝히고 있다.

2002년 9월과 2004년 6월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안 열사의 행방불명과 관련,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이어 2009년 7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도 안 열사의 행방불명을 민주화운동관련 행방 불명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2010년 7월 재심의에서 민주화운동관련 행방불명으로 처음 인정했다.

안치웅 장례위원회 관계자는 "비록 안씨의 시신을 찾지 못했고 부당한 공권력의 실체도 규명하지 못했지만 고통받아온 안씨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23년만에 장례를 치르게 된 것"이라며 "이번 초혼장을 통해 수난받던 민주주의와 후퇴하는 오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강민규기자  eas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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