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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석탑 제대로 복원했을까
사진=연합뉴스

백제 무왕(재위 600∼641) 때 창건한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20년에 걸친 보수 공사에 마치고 30일 제막식을 가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전라북도, 익산시와 함께 이날 오후 2시 미륵사지에서 석탑 보수정비 준공식을 열어 기나긴 해체·수리 작업이 마무리됐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익산시립무용단 무용극과 사업 경과보고, 기념사에 이어 참가자들이 흰색 가림막을 제막하자 보수를 마친 미륵사지 석탑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미륵사지 석탑은 여전히 한 쪽 측면을 상실하고 있었다. 20년이나 걸린 보수공사 기간에 비하면 너무나 당혹스런 모습이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석탑은 좌우 대칭이라 나머지 부분도 충분히 균형잡힌 모습으로 복원가능한 것이란게 일반인의 생각이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최대(最大)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은 부재 1천627개를 짜 맞춰 새롭게 완성했다. 높이는 14.5m, 폭은 12.5m, 무게는 약 1천830t이다. 탑 위에 돌을 하나 더 얹으면서 종전보다 30㎝ 높아졌다.

미술사적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석탑은 서쪽 금당(金堂)터 앞에 세운 서탑이다. 백제가 왕실 안녕과 중생 불도(佛道)를 기원하며 조성한 미륵사는 금당과 탑이 각각 세 개인 삼원식(三院式) 사찰로, 중앙에는 목탑을 두고 서쪽과 동쪽에 석탑을 건립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 문신 소세양의 문집인 양곡집(陽谷集), 조선 후기에 편찬한 기행문 와유록(臥遊錄)에도 등장한다.

영조 32년(1756)에 간행한 익산 읍지인 금마지(金馬志)는 미륵사지 석탑에 대해 "높이가 10여장(丈)이며, 동방에서 가장 높은 석탑으로 속설에 전한다"며 "벼락 친 곳 서쪽 반은 퇴락했다. 흔들렸음에도 큰 탑은 그 후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일제는 1915년 석재들이 일부 무너져 내린 미륵사지 석탑을 콘크리트로 긴급 수리했다. 이후 석탑은 약 80년을 콘크리트에 엉겨 붙은 채 버텼다.

서쪽에서 보면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느껴진 미륵사지 석탑은 1999년 문화재위원회가 구조가 불안정하다는 안전진단 결과를 반영해 해체·수리를 결정하면서 대역사에 돌입했다.

이듬해 석탑을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가설 덧집을 설치했고,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1년 10월 6층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해체에 나섰다.

해체가 완료될 무렵인 2009년에는 미륵사를 창건한 인물이 '좌평 사택적덕(沙宅績德)의 딸이자 백제 왕후'이고, 사찰 건립 시기가 639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리봉영기가 발견됐다.

삼국유사는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가 백제 무왕과 그의 왕비이자 신라 진평왕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라고 했으나, 사리봉영기에는 왕후가 사택적덕 딸로 기록돼 '서동요' 설화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미륵사지 석탑을 둘러싼 또 다른 논쟁은 층수였다.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사진에는 석탑이 6층이었으나, 1990년대에 2년 3개월 만에 복원한 동탑처럼 9층까지 탑을 쌓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하지만 연구소는 6층 이하 부재만 현존하는 데다 7층 위로 돌을 올리면 옛 부재가 하중을 견디지 못한다고 판단해 한 세기 전처럼 6층으로 보수하기로 했다.

김현용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미륵사지 석탑의 진정성과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연말까지 연구 성과와 해체·보수 과정을 정리한 보고서를 발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민규 기자  kotrin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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